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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같은 고난에서도 인도하신 하나님2019년 교사전국대회에서 박순애 전도사 간증
김형준 기자 | 승인 2019.12.05 13:12

박순애 전도사 간증을 요약한다. 이 간증은 교회학교전국연합회에서 지난 11월 22일~23일까지 개최한 제14회 교사전국대회에서 박 전도사가 강사로 나와 자신의 삶을 보여준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편집자주>

큰 감동을 준 박순애 전도사의 간증


박순애 전도사는 유명 간증 강사다. 삶의 질곡이 그만큼 깊었기 때문이었다. 박 전도사는 “나는 살아서 이곳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라며 “저 같은 사람을 세워주신 것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살아 있는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서두를 꺼냈다. 그러면서 “여러분은 내 열정, 내 열심으로 무엇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내 열심은 보상을 바라게 된다.”며 “성령 충만은 기쁨으로 나타난다. 기쁨으로 나타날 때 봉사로 나타난다. 기쁨으로 봉사할 때 성령님이 함께 하는 것”이라고 깨우침을 주었다.

특히 “내가 만든 희망, 내가 만들어낸 꿈은 욕망이고, 꿈은 욕망을 포장한 것”이라며 “진정한 영적 신앙은 내 생각을 넘어서야 한다. 사랑하는 게 믿음이다. 인정받음과 상관없이 묵묵히 해 나가는 것이 교사”라고 힘주어 말했다. 

박 전도사의 어린 시절

박 전도사의 고향은 구룡포이고, 그곳을 떠나 17살부터 27살까지는 산 속에서 호롱불을 켜놓고 살았다고 한다(박 전도사는 1963년생이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은 적이 없다(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녔다). 

박 전도사의 이야기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시작했다. 어머니는 부자집 천석꾼에게 시집을 갔지만, 남편이 결혼한지 보름만에 일본 징용으로 끌려가서 과부 아닌 과부로 살게 되었다. 결국 못참고 도망갔는데, 포항 구룡포에 살았던 박 전도사의 부친과 만나게 되어 같이 살게 되었다. 하지만 부친은 이미 3남매가 있었고, 노름빚까지 진 가장에다가, 배를 탄 선원이었는데 알콜 중독자이고 심한 의처증으로 육지로 돌아올 때마다 아내를 때리는 아주 나쁜 남편이었다. 박 전도사의 어머니는 갈비뼈가 부러지기까지 맞기도 했고, 맞아서 기절한 적도 30번 이상이었다.

박 전도사의 삶도 그에 따라 평탄할 리 없었다. 그나마 어머니가 있을 때는 박 전도사도 초등학교에 다녔지만, 육성회비를 못내서 학교에서는 매만 맞은 슬픈 기억밖에 없고, 어머니가 갑자기 가출하자 초등학교도 더 이상 다니지 못했다. 어머니가 맞을 때 말리던 어린 박 전도사도 아버지의 구타에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어머니가 가출하자 박 전도사는 3년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구걸하고 다녀야 했다. 

박 전도사는 대부분 산 속이나 남의 집 헛간에서 숨어 지냈는데, 마을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재수 없다고 사람들이 돌을 던졌다. 결국 피할 데가 없게 되자 재래식 화장터에 숨어들어가 지내야 했다. 그 화장실에서 거기에서 먹고 자고 했는데, 그 화장실 생활에서만 1년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녀가 거지가 될 줄도 모르고 남자에 눈이 맞아 도망갔다고 어머니를 욕하고 다녔다. 그러는 동안 박 전도사는 그야말로 완전히 상거지였다. 다른 사람들의 집에서 나온 음식찌꺼기를 건져 먹었고(그야말로 구정물이라고 했다), 그것을 먹으면 토하게 되는데, 배가 하도 고프니까 또 먹게 되고 또 토하기를 반복했다.

때로는 화장터에서 잠을 잤다. 사람을 한번 태우면 9시간 걸리는데, 한 겨울에 그 화장터에 들어가 자면 온기로 한 겨울의 밤을 견딜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나이에 그 밤에 무서웠지만, 살기 위해 그곳까지 찾아들어간 것이다. 너무나 무서워서 꼼짝도 못하고 가만히 그렇게 밤을 지새웠다. 잘 먹지 못하고 더러운 음식을 먹은 그녀에게 병이 찾아왔다. 더러운 음식을 먹으니 황달이 덮친 것. 거기에 폐병도 생겨 연신 피를 쏟아냈다. 그렇게 비참하게 살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마음 속에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다고 말했다. 박 전도사는 “엄마가 나를 데리고 온다고 혼자 희망을 가졌다”고 했다. 힘들수록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다.
 

인생의 전환점, 교회 선생님과의 만남

어느날 박 전도사는 배추와 무를 뽑아간 빈들에서 땅에 처박혀서 얼어 있는 무 잔챙이를 뜯어먹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귀에 어디선가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그 종소리가 너무 선명해서 마치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고. 박 전도사는 이때를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했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서 종소리를 따라갔는데, 바로 교회에서 나는 종소리였다. 교회에 도착하니 깡통에 따뜻한 밥을 채워줬다. 정말 오랜만에 본 밥이었다.

“밥의 구수한 냄새가 어머니 냄새 같았다” 

박 전도사는 이렇게 말했다. 밥을 먹기 위해 한쪽 담벼락에 가서 다시 보니 엄마 생각나서 또 울었다. 그 후 밥을 얻어먹으려고 교회에 갔더니 밥을 주지 않았다. 주일만 밥을 준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밥주는 날을 기다렸다가 드디어 주일에 교회를 찾아갔더니 같이 학교 다녔던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그 아이는 박 전도사를 보더니 “거지야 꺼져. 여기는 네가 올 데가 아냐”라고 소리질러댔다. 그 소리에 다른 아이들까지 나타나서 박 전도사를 밀어냈다. 박 전도사는 아이들의 겁박에 뒤걸음질치다가 담벼락까지 밀려갔는데, 더 이상 밀리지 못하자 애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때리기 시작했다. 때리면서 “다시는 이곳에 안 온다고 해. 안 그러면 계속 때린다”라고 했다. 박 전도사는 “나는 맞으면서도 ‘안 올께’라고 말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게 마지막 보루였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 맞고 있을 때 한 어른이 “누가 친구를 그렇게 때리니”라며 나타났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한 양, 어른에게 “이 거지가 왜 친구에요. 친구 아니에요. 얘는 거지구요, 쓰레기통에서 건져먹어요. 엄마가 도망갔구요, 얘 아버지는 술먹고 미쳤어요”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자 충격을 받았다. 다른 아이들의 말을 통해 나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을 처음으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아이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에 대한 정체성을 알려주었다.”

박 전도사는 그렇게 자신에 대해서 깨닫게 되자, 너무나 슬퍼서 자신도 모르게 교회를 뛰쳐나왔다. 그리고 아이들이 때릴 때도 안 울었는데, 아이들의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고 절망감으로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면서 계속 도망쳤다. 교회를 벗어나 골목길에 접어들자, 누군가 뒤에서 뛰어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아이가 아닌 분명히 어른의 큰 걸음 소리였다. 그 어른은 뛰어서 박 전도사 앞에 딱 서서 길을 막아섰다. 

“너 이름이 순애라고 그랬지?”
박 전도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무 대답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그 어른은 “순애야. 친구들이 너를 싫어해도 예수님은 너같은 아이를 더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박 전도사는 “엄마”라고 부르며 그 어른의 품에 안겼다. 냄새나고 더러운 몸으로 어른의 품에 안겼지만, 새 옷을 입은 그 어른은 박순애를 안아 주었다. 그 어른은 구룡포교회 교회학교 선생님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내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사람이 생겼다. 바로 그 교회 선생님과 같은 사람이었다”

박 전도사에는 그런 마음을 처음으로 가졌던 순간이었다. 교회 선생님은 파란 성경책을 주었다. 신약과 시편이 있는 책이었다. 교회 선생님은 박 전도사의 머리를 감기고 참빚으로 빚질했으며 냄새나는 그를 씻겼다. 그리고 옷도 짜서 주었다. 교회 선생님은 배고프면 자신의 집에 오라고 했다. 배고팠던 박 전도사는 날마다 그 집 앞에 갔지만, 들어가지는 않았다. 

“배고팠지만, 지금보다 더 힘들 때 아껴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집 앞에만 가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라고 박 전도사는 그 이유를 말했다.

박 전도사는 “선생님은 영혼을 보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내 모습에서 냄새나는 거지로 봤지만, 성령의 마음을 가지고 영혼을 보는 선생님은 거지 아이에게 존재의 기쁨과 함께 존재를 사랑하는 하나님을 심어준다”며 “그때 나는 교사와 선생님을 위대한 사람이라고 마음에 새겨넣었다”고 말했다.

박 전도사는 그 선생님의 한마디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다. 선생님은 “네 소원을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신다”고 말했다. 그때 박 전도사는 그 말을 믿고 화장실에서 울면서 성경책을 가슴에 안고 “엄마를 보고 싶다”고 기도했다. 

박 전도사의 당시 3년은 존재가 끝난 것과 같았다. 살 이유도, 살 가치가 없었고, 인간이라는 존재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밥 한 그릇을 주면서 자신을 유혹하기도 한 일도 있었다.  여자라는 생명 가치도 끝났고 자포자기한 심정에 자기 자신마저 버렸다고 했다. 그 어린 나이에 인간이 갈 수 있는 완전한 바닥까지 간 것이다. 그 어린 나이에 간경화와 폐병까지 왔다. 

그런 그에게는 보고싶은 엄마가 전부였는데, 그 자리에 하나님이 온 것이다. 그 하나님은 그 바닥에 있는 박 전도사까지 찾아오셨고, 그 분의 계획 속에 인도해 주셨다.

간증하고 있는 박순애 전도사

엄마를 만나러

3년 그렇게 살다가 13살 되었을 때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엄마를 만나러 갔다. 가면서도 “그런데 엄마는 나를 보고 싶어할까?”는 게 가장 궁금했다. 우려와 달리 엄마는 박 전도사를 보는 순간 충격으로 쓰러졌다. 그 때 엄마가 자신을 더 그리워했음을 보았다. 거기에서 엄마를 만나게 해 준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고도 했다. 

하지만 먹고 사는 일이 힘들다 보니 박 전도사는 중학생 나이에 식모로 보내졌다. 그곳에 식모로 보낸 엄마는 “순애야, 그곳은 쌀밥을 배불리 먹여준단다”, “학교에도 보내준단다”라고 했고, 그래서 엄마가 가라는 곳에 갔다. 하지만, 어린 순애에게 시련은 더 깊게 찾아왔다.

“식모는 노예나 종이다. 인권이 없다. 그냥 밥 얻어 먹고 사는 종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무지막지한 노동에 시달렸고, 소죽을 날마다 끓여야 했다. 내 나이 또래의 딸은 교복입고 학교에 다녔지만, 나는 추운 겨울 손이 다 터지며 일해야 했다. 그리고 주인은 빨래거는 장대로 날마다 나를 때렸다. 밥도 제대로 안 줘서 허기져 개밥을 먹었다.”

박 전도사의 기억담이다. 하지만 엄마가 “데리러 갈께”라고 했던 말만 믿고 꾹꾹 눌러 참았다. 잠은 구들장도 없는 창고 같은 곳에서 거적대기 깔아준 곳에서 잤다. 어린 순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선생님이 준 성경책을 꺼내서 매일 읽으며 울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주인집 딸은 부잣집 호강해서 살고, 저는 왜 이렇게 태어나게 하셨나요. 하나님이 있다면 나를 여기에서 구해 주세요.”

어느날 빨래를 잘 못했다는 이유로 주인 아줌마가 빨래 거는 장대로 또 때렸다. 그리고 빨간 고무 다라에 빨래를 넣고 다시 빨라고 시켰다. 그때는 한 겨울 밤 9시경이었다. 냇가에 갔더니 얼음이 얼어 있었다. 어두컴컴한 그곳이 너무나 무서운 것은 둘째치고 몸이 펄펄 끓어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겨우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 더는 견디지 못하고 아궁이 앞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곳에서 박 전도사가 “순애야”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환청인 줄로 알았는데, 진짜 엄마가 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환각인 줄 알고 보고도 믿지 못했다. 

엄마와 순애는 그 낯선 집 마당에서 서로 붙들고 통곡하고 울었다. 둘은 바로 그곳을 떠났다. 엄마는 청송군 어느 산골, 어린 시절 살던 근처에 박 전도사를 데리고 갔다. 산 속인데 폐허가 된 곳에 움막이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니 박 전도사의 아버지가 있었다. 아버지는 폐인이 다 되어서 완전히 산 송장과 같았다. 어머니가 그런 아버지를 안고 울었다. 아버지는 마지막 죽음의 시점을 앞두고 박 전도사와 부인을 만난 것이고, 엄마는 아버지를 용서하고 화해했다. 

산 속에서의 10년 생활

그때부터 산 속 생활을 했다. 17살에서 시작해서 27살까지 거기에서 살았다. 그녀의 삶은 나무를 해 와서 팔고, 짚볏단을 가지고 와서 밤새 호롱불 앞에서 새끼를 꼬아 짚신을 만들었다. 그것을 팔면 보리쌀을 사서 죽 끓여 먹었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니까 산에 가서 산나물과 고사리, 약초까지 캐며 생활을 이어갔다. 그 산 속에서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나무도 하도 잘 해 오니까 엄마는 더 가슴을 아파했다. 딸의 삶이 얼마나 험했던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박 전도사의 입장에서는 고생한 삶에 비해서는 이런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산 속에서 살다보니 사람들과 접촉을 해 본 적이 없다. 동네에서는 박 전도사를 근본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이상한 인간 취급해서 더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오직 엄마와만 지냈다. 그러다가 읍내에 갔을 때 교회를 보게 되었다. 교회를 보니 눈물이 났다.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성경책이 생각이 났다. 그녀는 엄마에게 구룡포 교회에서 있었던 일을 말했다. 엄마는 그것이 고마워서 같이 교회를 갔다. 하지만 교회에 가면 우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박 전도사는 이렇게 말했다.

“19살 때 주일날 설교를 듣는데, ‘하나님이 너를 사랑한다’는 말을 듣자, 계속 그 말만 들렸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나왔다. 사람들이 보면 돌을 던지는 비천한 나와 같은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하니, 마음에 충격으로 다가와 ‘사랑한다는 말’만 계속 들렸다. 그 소리가 보름동안 갔다. 그 소리에 뛰는 심장이 멈추지 않았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말은, 존재가 끝나버린 자신에 내면에 마치 쪼그라진 풍선에 바람 불어넣듯이 자존감을 세워주는 기름부음으로 나타났다. 계속 박 전도사 마음에 무엇이 일어났다. 박 전도사는 “그것은 영혼의 진동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런 중에 자신의 내면에 성경을 쓰라는 말이 들려왔다. 그때부터 밤마다 호롱불 아래에서 성경을 쓰기 시작했다. 19살 때부터 23살까지 쓰기가 이어졌다. 쓰는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가 물결쳤다. 박 전도사는 이렇게 말했다.

“배운 적이 없는데, 성경을 쓰면서 성령의 메시지, 말씀이 들어왔다. 그러자 구룡포에서 나를 왜 살려주셨는지 이유를 생각하며 사명감이 불타기 시작했다.”

박 전도사는 교사들에게 자신의 삶이 바뀌게 된 원인에 대해 ‘결정적 순종이 결정적 축복’이었다고 했다. 

“예수님을 만난 자는 만나지 않는 자처럼 살 수 없다. 환경이 바뀌어야 은혜를 받았다고 믿는데, 잘못된 것이다. 지금에 속지 마라. 믿음은 완성된 현재가 아니라 이뤄진 미래다. 완성된 현재를 믿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무너진다. 기도는 길어도 응답과 기적은 순간이다. 축복에는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다. 하나님의 방법이 있다.”

모세의 입장에서는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지만, 하나님은 모세의 출생과 모든 과정을 내가 모를 때도 알고 계신 분이었다. 이 영적인 세계를 알아야 진정한 믿음이라고 강조하는 박 전도사는 “생각이 앞서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에 앞서는 자가 되어야 한다. 믿음의 임계점, 즉 내 이성의 한계를 넘어야 하나님의 시간으로 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도하고 있는 박순애 전도사


3개의 산을 넘어 새벽기도에 가다

박 전도사가 말하는 결정적 순종은 성경을 쓰는 것 외에도, 새벽기도에 가겠다는 서원에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움막에서 교회까지 가려면 산을 3개를 넘어야 했고, 강과 언덕 읍내를 지나 더 들어가야 하는 길을 가야 한다. 그녀는 새벽에 산 길을 달려 교회를 갔다. 가는 길만 두 시간이었다. 

박 전도사는 어두컴컴한 길을 가면서 “나는 구룡포에서 죽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이 길을 가다가 죽으면 하나님께로 가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박 전도사는 “하나님을 위해 죽는 죽음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 하나님을 생명처럼 사랑하는 자는 목숨을 십자가에 내려놓아야 한다. 나는 그때 아무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 생명을 포기하기 쉬웠다. 나는 화장터에서도 살아난 사람이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산길을 밤 중에 달려서 교회에 갔다.”라고 고백했다. 
 
교회에 가면 아무도 새벽 예배에 나오지 않았다. 목사님은 성도가 없으니까 혼자서 기도하고 있다가 들어가곤 했는데, 집에 들어갈려고 하면 박 전도사가 나타났다. 그래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박 전도사 때문에 설교했다. 목사님의 개인지도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그 어둠의 길로 가면서 하늘의 신작로를 뚫었다. 새벽 길을 가는 동안 나는 죽었고, 교회에 도착하면 살았다. 그런 일을 반복했다.”며 “기도하지 않는 하루는 나에게는 죽은 하루였다. 예배 드리지 않는 하루는 죽은 하루였다.”고 박 전도사는 말했다. “기도의 차이가 능력과 축복의 차이다. 기도와 축복은 같이 간다”고 체험한 기도의 중요성을 전했다.

박 전도사는 교회에 가면 울기만 했다. 그러다가 19살 때는 성령체험을 했고, 기도와 예배, 말씀 읽기를 반복했지만, 박 전도사의 환경은 바뀌지 않았다. 10년 동안 산 산 속은 박 전도사에게는 절망의 장소였지만, 그 절망의 한가운데서 성경을 3번이나 썼다. 박 전도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밤마다 하나님이 박 전도사의 마음을 주관하며 이끌었다. 환경은 열악했지만, 흔들리지 않고 성경을 쓰고 기도생활을 해 왔다. 

그리고 공부하고 싶어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많은 책을 걷으러 다녔다. 화장실에는 종이 대용으로 책을 갖다 놓았는데, 박 전도사는 그 책을 빼서 집에 가져왔다. 그렇게 해서 읽은 책들이 세계적인 고전서, 시집, 세계 문학전집, 동서양 철학책 등 모든 분야를 망라했다. 시골 산골에서 밤이면 책이나 대학노트에 성경책을 쓰는 것으로, 새벽이면 기도로 자신을 훈련시켰고, 오히려 친구 한 명도 없는 것이 자신을 훈련시키는 데 더 좋은 점이 있었다. 

산 속에 살다보니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랐다. 문화도 몰랐다. 겨우겨우 모아서 소를 샀는데, 그 소를 팔아서 교회에 헌금해 버렸다. 그리고 잘 산다고 하는 오빠를 만나러 서울로 올라간 것이다. 그런데 세상 물정을 모르니까 돈이 얼마나 있어야 되는지도 몰랐다. 서울로 가는 차비를 쓰고 나니까 손에는 돈이 한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돈 한 푼도 없는 상태였지만, 오빠는 두 모녀를 싫어해 쫓아냈다.

초등학교도 못나온 이가 종합학원 원장이 되다

서울에 올라온 때가 1989년 겨울이었다. 오빠로부터 돈 한푼도 없이 쫓겨나자 1990년 1월 그 동네 교회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냥 여기에서 죽겠다고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며 기도했다. 그렇게 두 달간 울고 나니까(수돗물로 배를 채우며) 무허가 공장에 출근하게 되었고 가불을 해서 월세방을 얻었다. 여전히 가난했지만 밤마다 찾아가서 울 수 있는 교회가 생겼다는 게 그나마 좋았다. 교회에 다니면서 박 전도사는 선포했다. 새벽에는 하루 세 시간 이상 기도하고 또 주일학교 교사를 하겠다고.

하지만 낯선 여자에게 교사 직분을 맡긴다는 게 교회에서는 꺼림직했던지, 잘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 전도사가 새벽마다 교사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교회에서도 교사직분을 주게 되었다. 한데, 이미 작전이 짜져 있어서 아이들은 이미 다른 선생님에게로 배정되어 있었다. 다 배정하고 보니 미처 나누지 못한 딱 한 명이 남게 되었고 그 아이를 맡게 되었다. 박 전도사는 하나님께 자신의 것을 드리고 싶다고 서원했다. 그 방법으로 월급 중에서 생활비를 빼고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것이었다. 월세 등을 빼고 나니까 10만원이 남아서 매주 25,000원씩으로 나눠 매주 아이들을 위해 쓰기로 했다. 그 돈으로 아이에게 배불리 먹였더니 아이들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한 두 명 씩 늘어나 자신이 맡은 반이 교회에서 가장 크게 성장했다.

박 전도사는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 자신이 밤마다 읽었던 것처럼 성경을 읽게 했다. 그런데 두 명이 성경을 읽지 못하는 거였다. 그 아이들을 알고 보니 학교에서 받아쓰기가 빵점일 정도로 공부와 글에는 무관심했다. 박 전도사는 성경을 잘 읽히고 싶어서 아이들을 주중에도 계속 불러서 반복적으로 성경을 쓰게 시켰더니 나중에는 성경도 잘 읽고 받아쓰기도 잘해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 아이의 성적이 오르자, 그 아이의 엄마와 학교 선생님은 매우 놀래서 박 전도사가 아주 뛰어난 선생님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박 전도사에게 성적이 오른 아이의 엄마가 그 형을 가르쳐 달라고 데리고 온 것이다. 표준전과를 놓고 가르쳐야 하는데, 박 전도사의 말로는 “나도 모르고 애도 몰랐다”라고 했다. 결국 자신이 공부하면서 가르쳤는데, 가르치는 방법은 산 속에서 성경책을 계속 써왔던 방식, 즉 꾸준히 반복하는 학습을 했던 것이다. 효과가 좋아서 아이들의 성적이 계속 올랐다. 그러자 소문이 나서 과외하는 아이들이 점점 더 늘어났다. 물론 부모들은 박 전도사가 초등학교도 못나왔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냥 자기들끼리 유명 대학나왔다고 소문내고 다녔다. 

과외하는 아이들이 늘어나자 수입도 늘어서 “하나님, 저 과외만 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다니던 공장도 그만두었다. 한창 잘 나갈 때, 과외가 불법이라고 나라에서 단속을 벌여 결국 과외를 그만두게 되었다. 

박순애 전도사의 간증이 끝나고 기도하고 있는 모습

다행히 학원을 차리면 학원장의 학력은 상관이 없는 것이라서 학원을 열었다. 학원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이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아이들이 늘었고, 그것이 잘 돼서 나중에 700명의 종합학원 원장이 되었다. 그리고 빌딩도 샀다. 그러다 보니 수입도 늘 수밖에 없었다. 박 전도사는 수입이 아니라 매출액의 십일조를 드렸다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서 그렇게 잘 나가던 학원을 다른 이에게 넘기고 이제는 자신의 삶을 간증하는 전도사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박 전도사는 교사들을 향해 이렇게 마무리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교사는 매우 귀한 사명이다. 저의 꿈은 주일학교 교사였는데 그 꿈을 이뤘고, 교사가 되어서 기쁨으로 물질을 바치며 눈물로 기도하며 감당할 때 상상할 수 없는 종합학원이라는 기적을 이뤘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다. 여러분도 삶으로 정말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끝>

 

김형준 기자  ccancanj@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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