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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8장, 기적 아니라 생명 위한 표적으로 읽어야
정영구 목사 | 승인 2020.03.12 18:19

정영구 목사(하나교회)는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에게 ‘경전읽기-마태복음’을 강의해 왔습니다. 이곳에 게재된 글이 바로 이 강의 내용입니다. 평신도들도 기존의 성경 지식에 더 깊게 은혜받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편집자주>

정영구 목사


■ 기적과 표적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 마태복음 8장 이야기의 포인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와서 세 가지를 하셨습니다. 가르치시고 선포하시고 치유하셨습니다. 그 사역을 서른 살에 시작해서 서른세 살에 죽으실 때까지 삼 년 동안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최고의 학자나 최고의 종교지도자가 되시려는 것도 아니고 최고의 의사가 되시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그 당시의 사형제도였습니다. 강도나 악한 죄수를 죽이는 방식이 십자가형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십자가형을 당하지 않고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고통 없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시민권이 없거나 노예이거나 아주 극악한 강도짓을 한 사람들은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십자가형은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며 죽입니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도 모욕과 수치를 당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십자가에서 죽으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십자가가 죽음의 길인데 이 죽음의 길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가르치고 선포하고 치유하셨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가르침이었고 이를 강하고 담대하게 선포하시며 치유하실 때마다 환자들의 병이 다 나았습니다. 이것을 miracle,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을 본 사람들은 기적만 쫓아갔습니다. 암에 걸린 사람은 살고 싶으면 무슨 짓이든 다 합니다.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쫓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는 별 관심이 없고 오로지 병이 낫기 위해 쫓아온 것입니다. 내가 암에 걸려서 한 달 시한부 선고를 받았는데 어떤 용한 스님이 병이 낫게 해 준다면 기독교를 믿더라도 아마 스님을 찾아갈 것입니다. 사람들이 용하다고 하면 물불 안 가리고 지푸라기라도 잡습니다. 기적을 구하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키셨는데 그 기적을 일으키신 목적이 사실은 십자가로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기적을 통해서 표적을 보기 원하셨습니다. miracle이 아니라 sign을 보기 원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sign을 보지 않고 miracle만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쫓아가는 사람들을 ‘무리’라고 얘기하고 표적을 쫓아가는 사람들을 ‘제자’라고 얘기합니다. 관심이 다른 것입니다. 

8장을 읽어보면 병 고치는 얘기가 줄줄이 나옵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보면 정신과 내과 피부과로 나눠서 보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2천 년 전 이야기니까 병이 고침 받는다는 사실은 죽음에서 벗어나는 대단한 일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병 고치는 사건은 예수님한테만 일어났던 것은 아닙니다. 

천도교 <동경대전>을 읽어봤는데 교주였던 최제우가 글씨를 쓴 종이를 태워서 물에 타 병자에게 먹였더니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심하게 사기를 친다는 생각을 했는데 한참 읽다보니까 성경하고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을 때는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아멘, 아멘’ 하면서 읽었는데 다른 경전에도 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특징 중에 하나가 기적이 있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가면 병 치료해 준다고 현수막 걸어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병원인지 교회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처럼 종교가 가지고 있는 다른 측면에서의 기적이 있습니다. 기적을 심리학으로 얘기하면 신비, 무의식이라고 얘기합니다. 무의식은 사람이 모르는 세계니까 신비였는데 그 신비의 세계가 종교의 영역에서는 기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한테는 기적의 경험이 다 있습니다. 기적의 경험을 하지 않으면 종교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적은 sign, 표적이 되어야 합니다. 표적으로 가지 않고 늘 기적을 구하는 사람은 사기당할 가능성이 제일 많은 사람입니다. 몇 년 전에는 뉴스에서 무당한테 몇 천만 원인가를 사기 당했다고 고소했는데 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난 사건을 봤습니다. 어떻게 보면 종교인들은 반 합법적인 사기를 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기도는 증명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 믿고 기적을 경험한 사람도 많고 부처님을 믿고 기적을 경험한 사람도 많습니다. 절인지 수도원인지는 모르겠는데 그곳에 가면 목발이 아주 많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목발 집고 온 환자들이 그곳에서 기도하고 나아서 버리고 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종교가 가지고 있는 기적의 현장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을 쫓아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연이 먼저이고 기적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은 자연을 먼저 주셨지 기적을 먼저 주시지 않았습니다. 기적이 반복이 되면 자연이 되는 것이고 자연의 법칙을 깬 것이 기적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 숨 쉬는 것도 기적입니다. 제가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보면서 놀라운 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자연으로 받아들입니다. 아이를 낳는 것 자체가 기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자연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 있을 때 첫 애를 낳았는데 그 당시 한국에서는 아이 낳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했습니다. 그네 분만, 수중 분만 등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저도 아이가 제대로 나올지 걱정이 돼서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지금까지 인류가 애를 수도 없이 낳았습니다. 그리고 옛날에는 병원에 가서 낳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밭 일 하다가 애 낳고 탯줄도 직접 끊고 다시 일했다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인류가 생명을 낳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인데 굳이 염려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사실은 엄청난 기적인데 기적이 반복이 되니까 자연처럼 받아들이고 그것을 인정하고 사는 것입니다.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기적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표적은 다 예수를 나타내 줍니다. 예수는 누구인지가 모든 sign의 의미이고 예수의 정체성을 따지려면 결국에는 십자가를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결국 기적은 십자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죽음의 길을 이해해야지만 기적이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놀라운 기적 중에 하나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나사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나중에 또 죽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서 도대체 어떻게 살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구약에 있는 왕, 히스기야는 기도를 해서 15년 생명이 연장됐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평가가 ‘기도 안 했으면 더 좋았을 걸.’ 하는 것이었습니다. 15년 더 살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평가입니다. 더 오래 사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어떻게 살았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기적이 일어나서 어쨌다는 거야? so what!’ 병이 나았는데 제대로 살지 않고 오히려 병이 나은 것 때문에 더 망가진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기적이 의미가 있어야 되는데 오히려 화가 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통계가 있는데 로또복권에 당첨됐던 사람들의 삶을 추적해 봤더니 대부분이 사고사를 하거나 패가망신했다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못 해봤던 번지점프를 하다가 사고로 죽는가 하면, 돈이 아까운 줄을 모르고 막 쓰다가 오히려 빚더미에 앉은 사람도 있었고 모든 관계를 끊어버린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찾아오는 사람마다 다 돈 달라고 오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일상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로또 당첨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독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적이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적이 기적다워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렘브란트 1633년. 갈릴리 호수 풍랑 속의 그리스도

■ 영원한 생명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유하고, Teaching, Proclaiming, Healing 이 세 가지가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세 가지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습니다. 목적은 생명이었습니다. 예수님께 가르침을 받아서 진리를 깨닫게 된 사람들은 더 나은 생명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불교에서 스님들이 불도들을 가르칠 때 죽도로 때리듯이 깨우치게 하셨습니다. 

가르침은 눈높이 하는 자세로 해야 하는 것이고 선포는 상대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전하는 것입니다. 눈높이는 3학년이면 3학년 수준대로 어른이면 어른 수준대로 맞춰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면 선포는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상관없이 그냥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병을 고치는 것은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마음을 고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10명이 육신을 고침을 받은 것 보다 한 명이 마음의 고침을 받는 것이 훨씬 더 영향력 있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 한 사람이 또 여러 사람의 마음의 질병을 고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 사람이 또 죽었습니다. 만약 죽지 않았다면 우리가 지금도 그 사람을 보고 있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은 육신의 일인데, 하나님은 영의 고침을 원하셨습니다. 눈높이 해서 알게 되고 깨우침을 통해 고쳐져서 그 생명이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살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개념을 알게 하려다 보니 어떤 때는 눈높이 해서 가르치시고 어떤 때는 말씀을 선포하시고 또 어떤 때는 병을 고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적에 담긴 표적을 보지 못하고 늘 기적만을 봅니다. 좋아지고, 나아지고, 편해지는 상황은 변화무쌍한 것입니다. 인생이 오늘 죽을 맛으로 느껴지다가 갑자기 내일 장밋빛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는 것처럼 좋게 시작된 일이 나쁜 결과를 맺기도 하고 나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면 좋은 결과를 낳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생을 운7, 기3이라고 말하고 또 에디슨은 99% 노력과 1% 영감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99% 노력하면 되겠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1%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1%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있는 게 인생입니다.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노력하면 99% 까지는 갑니다. 그런데 그 1%가 물의 끓는점입니다. 마침표를 찍는 점이 1%인데 영감이라는 것은 모르다가  어느 순간에 ‘아 이런 거였구나.’ 라고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인생이 정말 노력한다고 원하는 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고 또 마음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냥 되는 것 중에 하나가 아이들이 자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부모가 부모로써 책임을 지려고 노력하고 건강을 위해 밥도 주고 성장을 위해 온갖 것들을 신경 쓰지만 어느 날 갑자기 보면 훌쩍 자라있고 어느 날 갑자기 목소리가 굵어져 있습니다. 키우려고 기를 쓰고 애쓰지 않아도 잘 자랍니다. 요즘 애들은 키 크는 약도 먹고 공부하려고 잠 안 오는 약도 먹는다던데 이랬든 저랬든 그냥 생명이라는 것 자체가 부조화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두 가지 생명이 있습니다. 

성경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생명이 있고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생명을 살 것이냐, 아니면 영원한 생명으로 살 것이냐? 생각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대단한 가르침, 대단한 명령, 대단한 치유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사역을 하셨지만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으로 가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생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다음에 이어질 마태복음 9장에는 바로 영원한 생명으로 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있습니다. 

 

정영구 목사  news@kmc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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